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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희미한 날들(상해개인전) 평론(한글) - 정수경
서상익
작성일 : 15-11-27 03:35  조회 : 1,253회 
아무것도 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서상익의 욕망과 권태, 그리고 자유로운 회화 유희


정수경 (미학/미술비평)


황금의 손으로 유명한 그리스왕 미다스가 어느 날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었던 현자 실레노스에게 인생의 지혜를 구하였다. “인생 최고의 복락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실레노스는 비웃듯 답하였다. “가장 복된 자는 나지 않은 자이고, 다음으로 복된 자는 일찍 죽은 자이며, 살아서 복된 자는 아무것도 되지 않은 자니라.”



화가인 아내를 둔 미국의 미학자 겸 비평가 단토(Arthur C.Danto)는 『예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에서 미술사의 전개과정을 성장소설에 비유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처럼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거듭하는 수없는 방황과 그를 통한 성장, 그리고 마침내 얻어낸 자각이 성장소설을 구성하듯이, 미술사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황을 통한 성장과 자각은 미술사 연감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화가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서상익 역시 그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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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듯하다. 말하기보다 그리기를 먼저 익혔다는 서상익에게 그림은 말보다 더 자연스레 체화된 소통 매체였다. 수많은 대상들의 감각인상들이 화면에서 눈이 아리도록 강한 존재감을 제각각 발휘하며 경합하는 그의 초기 그림들은 그의 시각이 얼마나 세세하고 민감한지를 보여준다. 과잉에 가까운 그 감각인상들을 언어로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그것들은 개념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되튕겨져 그림이 된다. 그처럼 말보다 더 편하게 그와 하나가 된 그리기는 그에게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주어진 운명일 뿐, 고민과 반성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능을 따라 미술계에 들어선 순간, 미술사의 축을 이루는 그 물음이 서상익에게도 던져졌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 미술계에 둥지를 틀고자 하는 자는 그 물음을 자기의 물음으로 삼아야 한다. 미술사의 연감에 등재되고자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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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변의 공간과 사물들, 자기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심적 현실의 몽상들 주변을 맴돌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던 서상익의 그림이 미술관이라는 특정 공간을 끌어들이고 미술사의 연감을 채운 거장들의 초상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마침내 그 물음을 자기의 물음으로 받아들였음을 뜻할 것이다. 자의건, 타의건. 아무래도 타의의 혐의가 짙은 것이, 그가 미술관이라는 제도와 공간을 다루는 태도, 거장들의 작품을 대하는 시각은 시큰둥하다 못해 시니컬하다. 폐허가 된 구겐하임, 종교적 숭배대상이 된 로스코라니. 이렇게 시작된 ‘미술사 궤도에 진입하기’는 2012년 <익숙한 풍경> 연작과 <화가의 성전> 연작으로 본격화되었다. <화가의 성전>에서 서상익은 세계적인 거장들의 초상을 전면에, 그들의 ‘BI’(Brand Identity) 같은 대표적 작품이미지를 후면에 그려낸다. 이를 통해 그는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화가란 무엇 하는 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답변의 계보를 추적하는 동시에, 손꼽을 만한 수많은 그리기 양식들을 거침없이 섭렵한다. 이로써 그는 미술사라는 성장소설의 새로운 주인공이 된다.
그런데, 이 새로운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통상적으로 성장소설의 주인공의 정체는 ‘발견’을 기다리는 상태일 뿐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인데 비해, 서상익에게는 그렇게 미리 결정된 정체성이 없는 듯 보인다. 그의 정체성은 수많은 거장들의 양식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그 양식들이 중층적으로 충돌하고 결합하면서 ‘구축’되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혼성모방’의 절충적 태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Nice Dream>이나 <잃어버린 풍경>, <익숙한 풍경> 연작의 몇몇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향기가 느껴지고, 그의 살 표현은 루시앙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주체로서의 그의 자리는 채워지면서도 기묘하게 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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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상황이 다소 답답했던 것일까. 서상익은 2013년 판 <익숙한 풍경> 연작을 통해 미술계라는 제도, 틀, 공간에 비판적 시선을 던지며 궤도 이탈을 꿈꾼다. <Another Day> 연작은 답답한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서상익의 심적 풍경이다. <Another Day-Lost Highway>는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흑백사진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그림 왼쪽 하단부에 마치 가위로 오려낸 듯 하얀 사각형 공(空)이 있다. 뒤늦게, 오른쪽 도로면의 사고 흔적과 회색빛 하늘을 가르는 무지개 같기도 한 희뿌연 연기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수수께끼는 <Another Day-No Fear>로 이어진다. 온통 회색뿐인 도시풍경 위에 생뚱맞은 주홍색 색면이 있다. 그로부터 도시의 교통체증과 어울리지 않는 경주용 자동차 한 대가 차원 이동이라도 하듯 튀어나온다. 이 자동차는 혹 전작의 고속도로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길을 잃고 헤매던 상태를 벗어나, 사고를 당한 주체를 일으켜, 흐릿한 연기의 무지개를 타고. 그렇다면 ‘no fear’는 ‘두렵지 않아’일까, 아니면 ‘두려워 말자’일까. 그리고 <Another Day-그는 그곳에 없었다>에서 마침내 세계는 색을 회복했다. 마치 영화 <플레젠트 빌>에서 삶이 대본을 벗어나 생생해질 때 흑백에서 컬러로 탈바꿈하듯이. 하지만 그곳 역시 녹록치 않은 세계이다. 광활한 허허벌판. 주유소는 있는데 차는 없다.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정육면체가 그 한 모서리를 쑤욱 들이밀고 있다. 주유소 옆에는 고속도로에서 보았던 그 탈출구 같은 흰 평면이 있다. 답답한 관례와 연감의 세계를 벗어나더라도, 평면과 공간의 문제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어디로 갈 것인가? 휴대전화 속 누군가는 그에게 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2013년의 작품들에서는 유독 흰 평면이 자주 등장한다. <토끼굴>의 하얀 동그라미는 토끼굴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다. 그러나 실은 ‘그저’는 아니다. 여백은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지점이며, 따라서 규정성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구멍, 일종의 탈출구이다. 어디 그뿐인가. 동그라미를 중심으로 나무그늘은 어느덧 연못으로 화하여, 주홍빛 금붕어들이 유영하는 환상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흰 평면, 혹은 여백, 혹은 텅 빈 캔버스는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익숙한 풍경-녹아내리는 문>에서는 지친 듯 주저앉은 세 청춘 앞에 그림이 녹아내리면서 흰 평면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압도하던 어떤 것이 녹아내리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중인가보다. 과연 어떤 가능성이 열릴까. <익숙한 풍경 11>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전시 브로셔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C what you C.” 그림은 읽는 것일까, 보는 것일까? 망설임 없이 후자라고 답한 당신은, 현대미술의 복잡한 속내에는 관심이 없는 게다. 서상익은 길고 긴 망설임 끝에 결국 같은 대답을 한 셈이고.
하여 서상익은 <Argotea> 카페의 여인처럼 상념에 잠겨, 그간 그가 현대미술의 내러티브에 매달려 잊고 있었던, 그리하여 그의 그림이 <잃어버린 풍경>, 다시 말해 그가 본 것들, 그의 눈에 각인된 점과 선과 면, 그 색채와 결에 대한 감각 자체를 회복하려 애쓴 듯하다. 붓질은 현저히 회화적(painterly)이 되었으며, 평면에서의 공간의 구축이 다시금 화면을 지배한다. 서상익 특유의 아린 색채도 되돌아온다. 회화가 회화적이어야 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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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2015년 <화가의 성전>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타자들의 내러티브를 쫓아 정체성을 탐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간의 작업을 통해 서상익은 미술에 진리(truth value)란 없다는 결론에 이른 듯하다. <신뢰할 수 없는 세계>는 불신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삶의, 기억의, 이미지의 고착 불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표명일 것이다. 그 세계에서 서상익이 마침내 발견한 미술의 특성은 ‘신념과 열정’을 토대로 삼는 종교적 메커니즘이다. 서로 다른 양식의 거장들이 미술사를 채우고 있다는 점 자체가 그러한 사실을 웅변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상익에게는 타인의 룰일 뿐인 듯하다. ‘신념’을 강조하는 그의 낯빛이 심드렁하다. 이 같은 권태의 감성과 서상익 특유의 날 선 감각과잉은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남다른 감각과잉은 세부와 작은 차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낳고, 세부와 차이에 대한 집착은 손쉬운 일반화와 신념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서상익에게는 ‘신념’보다는 모든 종류의 신념에 대한 ‘권태’가 더 잘 어울린다. 
사실, 미술사의 거장들에게 말로는 ‘오마주’를 바치면서도 서상익은 거장의 양식을 변경하거나 버리는 데에 별 주저함이 없다. 흥미롭게도, 그가 정말로 어떤 화가인지, 그의 회화의 BI가 무엇인지는 바로 이런 피상적 오마주 작업의 누수 지점에서 드러난다. <화가의 신전>들 그림 전면의 초상은 그가 얼마나 잘 그리는 화가인지를 알려준다. 편집증에 가까운 그의 세필은 쌀알에라도 그림을 그려낼 태세다. 그런 서상익이 거장들의 대표적 작품을 모사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양식을 저버린다. 잘 살펴보면, 장 뒤뷔페의 그림은 장 뒤뷔페답지 않고, 다른 그림들도 종종 그렇다. 그 불일치의 지점에서 서상익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가의 신전> 연작은 단순한 오마주 작업이나 다양한 양식 섭렵의 과정이 아니다. 참조보다 기각이, 그리기보다 지우기가,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중요하게 작동하면서 서상익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유령같이 희미한, 흔적 같은 정체성을 정체성이라 부를 수나 있을까? 이와 같은 그리기의 주체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불가피하다 보았던 주체의 분열과 피동성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만 같다. 자신의 것이 아닌 욕망에 붙들려, 그 충족이 영원히 지연되는 밑 빠진 독 같은 욕망의 연쇄 고리에 갇힌 비극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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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빠진 듯 무심한 권태의 눈빛 하나로 서상익은 그 비극적 운명과 맞장을 뜬다. 신열에 들뜬 욕망과 구애의 눈빛이 아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듯한 권태의 눈빛 앞에서 주체의 비극은 그 비극성을 상실하고, 묘한 방식으로 유머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의 작품이 다소간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이 슬랩스틱처럼 말초적으로 웃겨서라기보다는 자신이 맞닥뜨린 자충의 상황에서 그가 취하는 희한한 거리두기, 혹은 귀차니즘의 태도가 피식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과잉감각과 대치하는 미술사에 대한 관념적 참조, 집요하고 편집증적인 세밀화의 태도와 그를 벗어나고자 슥 그어버리는 붓질,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픈 욕망 대 멜랑콜릭한 염세주의의 긴장을 ‘선택’을 통해, 혹은 ‘변증법적으로’ 해소하는 대신에 서상익이 택한 ‘다 같이 내버려두기’의 귀차니즘과 권태의 눈길이 작품에서 느껴질 때,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 순간 우리는 약간은 허랑방탕한 그의 나쁜 인간 캐릭터를 그림에서 느끼며 매혹될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와 다를 바 없이 삶의 난국에 빠진 권태로운 현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이처럼 토마스 만이 ‘후모’(Humor)라 불렀던 바, 삶의 아이러니를 초월적으로 무심히 바라보는 태도가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런 태도의 극단에 실레노스의 지혜가 있다. “아무 것도 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실레노스의 지혜는 미술사의 성장소설에 관한 단토의 결론과도 공명한다. 단토는 미술사라는 성장소설의 대단원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따라서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궁극의 ‘자유’를 두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부르짖을 만큼 무엇인가 되어야만 인정받는 시대에, 그저 그릴 뿐, 그 그리기를, 그리기를 하는 자신을 규정하려 하지 않는, 어떠한 동일성에도 머물려 하지 않는 서상익의 그 소심하고 어눌한 뻔뻔함에 어찌 싱긋이 웃음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뻔뻔함은 실은 대단한 자신감의 발로이다. 그 어떤 스펙, 가치의 아우라를 덧입힘 없이 그냥 존재하고, 그냥 그리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 그것이 바로 리오타르를 위시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열망해 마지않았던 진정한 인간 ‘현존’(presence)의 상태이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자가 행복하다는 실레노스의 금언은 일견 염세적이지만, 실은 가장 진취적이며, 또한 다다르기 가장 어려운 존재의 무아지경인 것이다. 아무것도 되지 않으면서 불안하지 않을 수 있어야,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하므로.



서상익이 마침내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는 여전히 <불면의 과학>에 시달리고, <너무 늦은 건가?> 회의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오>라고 혼잣말을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허위의식이나 어려운 개념으로 포장하기를 원치 않는 그의 태도는 그가 어느 노선을 택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여전히 공간의 문제와 씨름하고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액자소설 같은 모노드라마를 구성하면서, 서상익은 혼돈을 긍정하는 자유로운 회화 유희에 몸을 맡기는 법을 터득해나가고 있다. 각성의 대단원은 오지 않아도 좋다. 무엇인가 된 자의 “Happy Ever After” 대신 아무것도 되지 않은 자의 “Happy Right Now”가 더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