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seosangik.com

 
2010. 12. 서커스 (두번째 개인전) 전시 평문
서상익
작성일 : 12-11-21 00:11  조회 : 1,162회 
현실에 덧붙여진 유머러스한 상상의 농담걸기, 그리고 진실


글. 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란 듯이 그림을 까맟게 칠해 놓고서는 낄낄거리고 있는 저 원숭이 녀석. 왜 그랬을까. 원숭이의 그 익살스러운 행동을 보면서 왠지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 아무튼, 간신히 그 녀석에서 눈을 떼고, 시선은 화면을 훑는다. 전시장 바닥에는 고뇌에 찬 가수(서상익은 그가 커트 코베인이라 알려주었다)가 주저앉아 있다. 바로 그 앞. 낄낄거리는 원숭이와 고뇌에 찬 가수를 향해 끊임없이 플레시를 터트리고 있는 관/객/들. 바로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정경이란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사람이면 의례 성지 순례하듯 찾아다니는 작품들이 있다. 바로 모나리자. 마치 현장검증이라도 나온 경찰이라도 되는 듯, 관객들은 ‘모나리자의 현장’을 잡는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저 그림. 어쩌면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던 것 아닐까. 서상익의 미술관 시리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개인전 <녹아내리는 오후>은 서상익은 첫 개인전답지 않게 완성된 그림과 작가 고유의 독특한 기법이 눈에 띄는 전시였다. 작가 작업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노곤한 일상을 그리거나(<양들을 위한 시간>,<일요일 오후4시>), 영화 속 한 장면과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한 순간과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방식 (<에스겔 25장 17절>)을 통해서 판타지와 일상, 공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스펙터클하게 결합시키는 방식이 서상익이라는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특유의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농담걸기’는 분명 그의 작업을 특징짓기에 충분했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느슨한 시선, 그리고 거기에 대한 농담 섞인 말걸기의 방식은 여전했다. 그림 속엔 자연스럽게 작가의 일상이 들어오고, 그 일상은 작가의 상상 혹은 공상과 뒤섞이거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온 사람들이 짜깁기 되어 있었다(<사연 많은 도시>, <이방인을 위한 도시>). 그런가 하면 예전처럼 영화에서 따온 장면도 끼어들어 오고(<나를 위한 나라는 없다>), 커트 코베인이나 존 레논처럼 잘 알려진 가수들의 얼굴도 종종 눈에 띠었다.

그러나 이런 익숙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서상익의 작품들에서는 예전의 사적인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 조금씩 다른 층위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의 조짐을 읽을 수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화면 속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작업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영화의 이미지나 작가의 상상이 덧붙이는 방식으로 공간을 다루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미술관’, ‘아파트’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간들을 드러냈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은 줌 아웃 되듯 뒤로 확 물러서고, 그 자리에 공간의 구조와 이야기를 통해서 화면안의 에피소드를 일관되게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미술관 전경을 찍은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그 안에 덧붙여진 무수히 다른 공간과 이야기의 레이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산만해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상에서 포착한 하나의 순간처럼 자연스럽고 견고한 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해 냈다.

작가가 주목한 공간이 바뀌면서 작품이 가지는 의미와 해석의 차원도 다양해졌다. 물론 ‘미술관’이나 ‘아파트’라고 하는 공간들은 이름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작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다소간 사회적 제도/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다. 일례로 앞서 소개한 과 같은 미술관 시리즈들은 미술계(art world)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과 함께 논의 될 수 있다. 미술관 한 켠에서 의자가 아닌 변기에 앉아서 무심하게 혼자 체스를 두는 마르셀 뒤샹이나, 그와는 상관없다는 듯 거꾸로 매달린 피아노(이 피아노는 레베카 혼의 ‘무정부주의를 위한 소나타’이다)를 ‘우러러보며’ 감상하는 관객들을 그린 , 미술관 안을 버젓이 돌아다니는 펭귄, 작품을 보는 작품을 보는 것인지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인지 알수 없는 관객들, 그리고 그 뒤에서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로드코의 근엄한 그림을 담은 <소외된 자들의 만남>과 같은 작업들은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혹은 미술계에서 부닥거리면서 느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미술계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곱십어보게 한다. 이런 경향은 <길들여지지 않기>는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색 캔버스 앞에서 심각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 앞에 어처구니 없이 카펫을 물어뜯고 있는 코요테의 등장. 오른쪽 하단 구석에 뜬금 없이 들어와 있는 쓰러진 사람의 손, 그리고 모자 하나. 물론 코요테나, 모자 그리고 쓰러진 사람의 손은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요셉 보이스의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라는 퍼포먼스를 패러디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치도라도, 현대미술계를 둘러싼 서상익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음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림 앞에 서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는 것은 왠지 서상익이 말하는 미술계에 대한 소심한 비아냥거림에 우리도 은근히 동조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서상익의 ‘미술관 시리즈’가 미술관이라는 체계/구조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려고 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첫 개인전을 마치고 미술계에 첫 발을 들여다 놓은 한 젊은 작가가 겪은 다양한 경험들이 미술계라는 것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들게 했다는 것이 ‘미술관 시리즈’의 출발이라는 편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이라는 건물/구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함의가 강하기에 언뜻 그의 작업이 많이 바뀐 듯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작업실에서 나와 ‘미술관’, ‘아파트’라는 사회적(때론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건축구조가 본격적으로 들어옴으로써, 그의 작업이 해석될 수 있는 층위는 분명 다양해졌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공간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이질적인 상황들의 조합을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방식이다. <녹아내리는 오후> 전시에서 소개되었던 많은 작품들은 대단히 평면적이었다. 예를 들어 <대화의 시간- 양들은 질문을 멈추었는가>의 경우, 작업하고 있는 작가의 뒤에 ‘양들의 침묵’의 앤소니 홉킨스가 나오는 장면이 함께 보이더라도 이 두 개의 이질적인 상황들이, 영화와 현실이라는 이 서로 다른 공간들의 매칭은 그저 하나의 견고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가 아닌, 관객이 이미지 안을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관객이 여행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친절하게도 매 작품마다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모멘트/모티브를 배치해 놓았다. <소외된 자들의 만남>에서는 전면의 펭귄으로부터, 뒤에 있는 관객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편에 있는 남자에게로 왔다가 뒤에 있는 로드코의 그림으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을 여행하게 하는가 하면, <길들여지지 않기>에서는 텅 빈 흰색의 캔버스에서 시작하여, 심각하게 서 있는 관객으로, 그리고 다시 왼편 구석에 천연덕스레 카펫을 뜯고 있는 코요테에로 시선이 멈춰진다. (혹은 코요테에서 캔버스로, 캔버스에서 다시 관객으로, 그리고 다시 화면 전체로 시선이 흘러가기도 한다)

미술관 시리즈는 아니지만 <핑퐁-끝없는 렐리>에서도 이런류의 시선의 이동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화면의 꽉 채우는 아파트의 베란다. 서상익은 획일적인 듯 보이는 이곳에서도 다양한 일상들이 공존함을 그려내고 있다. 어떤 집은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어떤 집에는 파파라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는가 하면, 무료함에 지쳐 있는 일상도 눈에 띤다. 그렇게 아파트 집 하나하나를 훑어보고 나면, 문득 시선을 사로잡는 탁구대 하나. 이 작업이 소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탁구대와 뒤에 있는 아파트 안에서의 삶의 대비가 뭔가 묘한 감정을 자극한다.

이런 식의 전략은 서상익의 그림을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 공간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바쁘다 바뻐!”를 외치던 회중시계를 찬 토끼 아저씨가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데려가듯, 아니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던 마르셀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 들어가듯, 화면속의 하나의 모티브는 어느새 관객을 서상익의 그림 속 공간으로 이끌어간다. 영화 속에서, 작가의 상상 속에서, 혹은 일상에서, 때로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도려낸 이미지들이 서상익의 붓을 통화 화면 속에서 새로운 공간과 이야기를 끌어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는 행위는 꼭 동화책을 읽는 느낌이고,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동물이나 모티프들은 우리를 그림으로 안내하는 안내인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그의 이야기 안에는 언제나 농담어린 유머가 있기에, 그의 그림 속을 산책하는 일은 관객들의 입가에는 언제나 빙긋 웃음의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