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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녹아내리는 오후(첫번째 개인전) 전시 평문
서상익
작성일 : 12-11-21 00:22  조회 : 1,178회 
Use your illusion


이진숙(인터알리아 아트 디렉터)



최근의 한국미술에서는 회화의 복권 주장과 더불어 구상회화의 붐이 불기 시작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한국미술시장에서의 콜렉팅의 붐과 관련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구상회화는 콜렉팅의 일차적인 표적이 되면서 붐을 이루고 있다. 짧은 극사실주의의 복권과 더불어 이런 젊은 작가들의 구상회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중의 하나가 작품에서의 ‘스토리의 복원’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가 중의 한명이 서상익이다. 그가 탁월한 스토리 텔링 능력은 우리 미술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거라는 기대를 감히 가져본다. 그의 표현법보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테크닉이 이미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난 안정적인 것이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서상익의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는 우선 앞서 지적한 회화의 유물론적인 탐구가 어느 정도 지난 지점에서 이제는 더 이상의 형식 실험조차도 진부해졌다는 것이다. 소재 자체가 갖는 물성의 탐구, 새로운 소재의 발견(한지, 유화, 아클릴릭 등 재료 혼합)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시점에서 회화는 구상회화의 틀 안에서 새로운 단계로 서서히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구상회화의 요체는 더 이상 극사실주의적인 묘사 자체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롭게 스토리에 기대기 시작했는데, 이 스토리는 기존의 서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맥락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은 인상주의 때부터 시작하여 추상미술에 도달함으로써 결정적으로 문학(스토리의 지배)으로부터 벗어났다. 추상미술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인 고찰을 제안했던 칸딘스키는 “자연의 작은 조각이나 분홍 옷을 입은 부인의 초상화에서처럼 모든 것의 가장 사소한 것들에 매달리는” 미술에 반대하면서 추상미술을 제안했다. 칸딘스키가 가장 역겨워한 것은 전통적인 대서사가 사라진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상의 남루함이었다. 20세기 초반 소설에서 대서사의 소멸 선언과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문화사적인 현상이었다. 문학의 지배력에서 벗어나자 회화의 유물론적인 측면은 더 강조되었다. 그림의 재료가 가지는 물성에 대한 강조는 추상표현주의 이후에 등장한 모든 추상회화의 공통적인 특성이었다. 어떤 양상의 추상미술이건 그 기저에 깔려있는 것은 삶의 소소한 산문을 혐오한 엘리트주의적인 작가의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추상회화 전반을 모더니즘으로 범주화하는 일차적인 근거가 된다.

한국 미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미술에서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었던 ‘모노크롬’ 회화는 회화적인 물성에 대한 강조와 서사(스토리)를 배제한 직관적인 통찰을 그 특징으로 한다. 70년 중반에 등장한 극사실주의는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반발이기는 했지만, 스토리의 배제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대부분의 극사실주의 작가들은 ‘극사실주의’라는 이름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그리는 가시적인 이미지의 저편을 인식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 역시 같은 ‘일상의 삶’을 초극하려는 노력에서 기인한다. 스토리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80년대의 민중미술이었다. 그러나 민중미술의 퇴조와 더불어 우리 미술에서 서사적인 스토리는 결정적으로 무대에서 사라진 듯이 보였다.

문학과 미술에서 잠시 실종되었던 스토리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인류 역사상 스토리가 사라지는 법은 없다. 잠시 잊혀질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 살아가는 이야기, 즉 스토리라는 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영화, 드라마, 게임, SF물 등 대중문화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가 사라지고, 혼용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중문화 속에 간직되어 있던 서술적인 요소가 다시 미술에 틈입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문화의 수용은 작가들이 모더니즘 특유의 엘리트주의를 버리고 대중문화를 삶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스토리가 삶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는 삶을 압도하고, 세상에 어떤 영웅보다 더 위대한 영웅들은 SF물에서만 만날 수 있다. 최근 팩션(Faction: fact와 fiction의 합성어. 주로 역사적인 사실과 작가적 상상물의 결합)의 대 유행 역시도 작가의 상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삶의 진부함과 남루함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 돌아온 것은 작가적인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회화의 공간속에서 일상과 상상이 만나는 연극의 순간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이런 상황을 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대서사가 사라진 우리의 삶은 소소하고, 무의미하고 메마른 일상의 연속이다. 그 일상을 의미 있는 그림의 소재로 만드는 것은 그의 ‘상상’이다. 우선 서상익의 상상의 뿌리는 영화, TV, 대중음악 등 대중매체라는 점이다. 서상익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던 작품은 이었다. 그 우람한 갈기털이 무색하게도 사자는 좁은 자취방의 작은 침대에서 혼곤한 잠을 자고 있다. 일요일 오후 네 시, 느슨한 시간이면 TV에서 ‘동물의 왕국’이 방영된다. 이 프로그램의 메인 히어로우인 사자는 하루 평균 17시간에서 21시간을 잔다. 게으른 백수의 왕이 좁은 자취방 공간과 오버랩되면서 하나의 장면을 이루어 내고 있다. 이 이외에도 강한 스토리 라인이 담겨있는 영화의 한 장면들이 일상에 서슴없이 들어온다. 작품 <양들은 잠들었는가?>,<양들의 시간> 등은 노골적으로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대목들을 작품 속에서 인용하고 있다. <무엇이 나를 남자로 만드는가?> 시리즈 역시 대중 매체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 작품들이다.

이렇게 상상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일상의 남루함이다. 그리고 이 상상의 밑바닥에는 MTV세대 혹은 88만원 세대의 무기력과 두려움, 위축된 감정이 깔려있다. 그의 작품은 삶이라는 말을 ‘일상’이라는 말이 대체해버린 우리의 현실에 대한 직시로부터 시작한다. 2007년 작 <무엇이 나를 한심하게 만드는가?> 시리즈는 가감 없이 자신을 드러낸 그림들이다. 묘한 동영상 화면 앞에 쌓여있는 휴지더미와 끼니를 때운 컵라면 용기들을 그린 이 그림들은 그의 앞에 놓여진 현실의 삶의 시시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시한 현실 앞의 무기력한 자아 -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직시 이후에 상상으로 현실을 구제함으로써 본격적인 서상익적인 세계가 구축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방식, 내가 느끼는 것을 전달하는 것, 내가 바라보는 세상으로 재구성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짧은 문장이만, 무려 네 번의 “내(I)”가 존재한다. 작가는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무엇이었는가?

2007년 작 는 시대를 풍미했던 락 그룹 ‘Guns & Roses'의 연주자 슬래쉬가 그의 자취방 한켠에서 멋들어진 모습으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은 노래의 제목일 뿐 아니라, 서상익의 작품을 설명하게 하는 키워드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슬래쉬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기타이다. 이는 슬래쉬의 연주에 감명을 받아서 배우기 시작했지만, 현재의 형편없는 자신의 기타 솜씨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이런 상상의 틈입은 한편으로 시시한 일상을 구원해 작품의 대상이 되게 만들어 준다. 이번 전시 제목 <녹아내리는 오후> 역시 이런 상상이 일상으로 틈입하여 혼융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상상은 다시금 일상의 무기력과 남루함을 강조하고, 때로는 현실을 압도하고 가치 평가를 내린다.

<에스겔 25장 17절>에서 영화속의 인물은 그림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작가에게 총구를 겨눈다. <양들은 잠들었는가?>에서는 양떼들이 화면의 상층부에서 현실의 공간을 압도한다. <무엇이 나를 남자로 만드는가? 2>에서는 왼편의 대중매체 속 이미지에서는 승리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데, 오른편의 현실 속 인물은 지치고 패배한 모습이다. <달콤한 꿈>에서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성공한 젊은이가 서울의 야경을 뒤로 하고 있는 모습이다.(저런 서울의 야경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조망권 자체도 사회적인 부의 배분 관계를 나타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유리에 비쳐진 것은 작은 자취방에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현실의 젊은이다. 영화나 대중 매체의 스토리가 ‘상상’이라는 매개물로 일상의 작은 부스러기들과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작품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스토리는 문학적인 논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회화적인 논리에 입각한 것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신선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이 상상이 순전히 서상익 개인의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상상력이 대중매체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상상은 그만의 것이 아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상상이며 일상은 그저 화면의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배경 역시도 시대의 이름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서상익 작품의 배경에 주로 등장하는 것은 작업실과 자취방 등 작가 개인의 공간이지만, 이 개인의 공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일종의 도상적인 기능을 갖는다. NY라고 쓰여진 푸른색 선캡, 등이 두 쪽으로 갈라진 의자, 옷이 걸려있는 행거, 다용도로 쓸 수 있는 박스 등 모두 그의 개인 용품이지만, 너무나 평범한 물건들이다. 이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들은 남루한 일상의 아이콘으로 그의 방을 익명의 방으로 만들며 보편성을 부여한다. 이 남루한 일상의 물건들은 이런 익명성으로 해서 시대상을 보여주는 물건들, 우리 시대의 특징이 된다. 서상익의 화면에 스토리가 복원됨으로써 하마터면 버려졌을 우리 시대의 삶이 ‘그려질 가치가 있는’(츠베탕 토도로프) 것이 되었다.